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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박재란이 7월 8일 KBS 가요무대에 출연합니다. 

 

과거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까지 산 너머 남촌에는을 비롯하여 다수의 곡을 히트시키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가수 박성신의 엄마로도 잘 알려져 있는 가수 박재란입니다. 

 

이에 박재란 나이 프로필 이혼 전남편 딸 근황 등 많은 관심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가수 박재란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가수 박재란 프로필 본명 나이 고향 가족 딸 박성신 종교 학력 

 

가수-박재란

 

가수 박재란의 본명은 이영숙입니다. 박재란 나이는 1938년 12월 16일생으로 올해 나이 85세입니다.

 

박재란 고향은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이며,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가족으로는 언니 4명, 오빠 1명, 여동생 1명, 장녀 박성은이 있습니다.

 

 

둘째 딸인 박성신(1968년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8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한 이후 1989년 한 번만 더 라는 노래 작품으로 공명의 히트를 거둔 가수로, 안타깝게도 2014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해 지금은 첫째 딸 박성은만 있습니다. 

 

박재란 종교는 개신교(장로회 권사)이며, 학력은 충청남도 천안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는 천안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수 박재란 집안 부모 과거 데뷔 활동

 

가수-박재란

 

박재란은 오르가니스트로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했던 아버지와, 개신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그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1953년 주한 미 8군 라이브 클럽에서 본명인 이영숙이라는 이름으로 가수로 첫 데뷔했습니다. 

 

이후 박재란은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김광수 문하에서 음악 수련을 했고,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박태준 선생은 박재란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박재란은 이후 1957년 정식 가수로 데뷔, 이후 뜰 아래 귀뚜라미, 럭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등을 비롯한 여러 노래들을 히트시켰습니다. 

 

그리고 1년 후인 1958년에는 파인 김동환 시에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동현이 작곡한 '산 너머 남촌에는'이 연이어 히트를 했고, 절세 미녀인데다 연기력도 탁월해 이듬해인 1959년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단역 출연을 통하여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박재란은 같은 해(1959) 피얼리 쉘즈라는 작품을 한국어 가사로 번안 작사하고 박춘석이 편곡한 진주 조개잡이라는 노래를 받아 불렀고, 이 노래는 국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여름 애창 노래 가운데 인기 애창 번안곡에 손꼽히는 노래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수-박재란

 

가수-박재란

 

이렇게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시키며 일찌감치 국민가수 반열에 오른 박재란은 당시 그녀가 착용하는 미니스커트, 유리구두 등 패션 아이템이 매번 화제가 되었고, 이에 패션 디자이너 고 앙드레 김에게 의상을 선물 받으며 그의 뮤즈로 자리매김 하기도 했습니다. 

 

박재란은 인터뷰를 통해 과거 생전 앙드레 김이 '박재란 씨 옷을 해서 입히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라고 했다며 앙드레 김과의 추억을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가수 박재란 결혼 전남편 나이차 직업, 누구? 결혼스토리 딸

그런데 그렇게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박재란은 돌연 결혼을 발표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남편(첫번째 남편)은 박운양씨로, 동갑내기이자 당시 성균관대생이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그녀가 작곡가 김광수씨 집에 갔다가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요, 전남편 박운양씨는 작곡가 겸 연주인 김광수씨가 출연하는 카바레의 단골로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고 합니다.

 

박재란은 그렇게 전남편과 사랑이 시작된 이후 결국 결혼에 골인, 이후 자녀(딸 2명)를 낳게 되는데, 그 중 둘째 딸이 바로 1989년 한번만 더로 사랑받았던 가수 박성신입니다.  

 

가수 박재란 첫 남편과 결혼생활과 이혼 사유

 

가수-박재란

 

하지만 박재란의 첫 번째 남편과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되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함께 쇼 단체를 만들어 전국 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것입니다. 

 

 

이에 100평 남짓하던 서울 후암동 2층집에서 용산 단층집으로, 또 갈현동 전셋집으로 전락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의 외도로 결국 이혼을 택하게 됩니다. 

 

박재란 : "둘이 달콤하게 연애했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내가 너무 바쁘게 일하다 보니 부부지간에 다정한 만남, 외식 등을 하지 못했다. 나는 돈만 벌 줄 알았다. 남편에게 결혼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밥을 해준 적이 없다."

 

박재란 : "전남편이 사업했는데 내가 벌어놓은 돈이 사라졌다. 워낙 빚을 많이 졌고, 사업하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내 돈으로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 갈현동 구석 전셋집으로도 이사 갔었다. 집 두 채 다 팔아먹었다."

 

박재란 : "그래도 두 딸이 있으니까 가정을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전남편이 당시 명동에 있던 다방 마담과 홍콩으로 도망가려고 비자까지 다 받아놨더라."

 

박재란 : "그때 이혼을 결심했다. 안 되겠다. 너를 내가 남편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남편하고 이혼할 때 내가 피해 다녔다. 전남편이 이혼을 안 해주려고 했다."

 

박재란 : "(당시 가수 한명숙 집에 숨어 있을 때) 남편이 나를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늘이 두쪽이 나도 네 마음은 변치 않았을 거야 라고 말했다."

 

박재란 : "하늘이 두 쪽 나도 변치 않을 사람이 변했을 때는 끝난 거야 가라고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여자가 당시 이혼한다는 건 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재란 : "그래서 우울증이 왔었고, 미국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한국에서 살 수 없었다. 남에게 사기를 당했다. 제가 너무 상처가 커서 한국에 머물 수가 없었다"

 

가수 박재란 첫번째 남편과 이혼 이후 미국생활

 

가수-박재란

 

박재란은 결국 그렇게 첫남편과 13년 만에 이혼, 이후 이혼의 아픔을 잊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하고 미국 길에 오르며 새 출발을 다짐하게 되었고, 두 딸은 이후 미국에서 자리잡으면 데려가려고 했지만 전남편이 자기가 키우겠다고 해 딸 둘을 한국에 남겨두고 떠나게 됩니다. 

 

이후 박재란은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재기에 안간힘을 썼고, 동시에 한국을 오가며 음반을 발표하며 방송에도 종종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연예인들이 이따금씩 귀국해 활동하는 것에 대해 국고를 해외로 빼돌린다는 투서사건이 발생, 국내 활동이 일체 중단되었고, 점차 대중들로부터 잊혀져 갔습니다.

 

그런가운데 박재란은 미국에서 친한 지인에게 레스토랑 사업을 제안받고 억대 사기를 당해 10억을 날리기도 했고, 1979년 아파트 화재로 모든 걸 잃고 병을 얻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불법체류자로 열흘 정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외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딸들이 보고 싶어 다시 국내로 들어오고 싶었지만 들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박재란 : "두 딸을 두고 먼저 미국으로 떠났었다. 이후 내 여건과 아이들 아빠 때문에 15년 이상 만나지 못했다. 미국에서 신문으로 딸인 박성신이 가수로 데뷔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재란 : "미국 생활 당시 떳떳하게 딸들을 만나서 오고 싶었지만 상황이 안 좋았다. 영주권이 없어 불법체류를 하면서 험난하게 살았다. 추방당할 위기였다. 이러한 한계가 있었고 결국 유치장까지 갔다." 

 

가수 박재란 두 번째 남편과의 재혼과 이혼, 이혼사유

 

가수-박재란

 

그러다가 이후 박재란은 미국에서 만난 10살 연하의 한인 남성과 재혼해 영주권을 취득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남편이 친구를 잘못 만나 아편을 시작한 이후 행방불명돼 결국 재혼 5년 만에 다시 이혼하게 됩니다.

 

박재란 : "나를 좋아하는 연하의 남성과 라스베이거스로 가 결혼을 해 영주권을 취득했다. 두 번의 결혼 실패를 하기는 정말 싫어 노력했다"

 

박재란 : "이 양반이 친구를 잘못 만나서 아편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집에 안 들어오고 행방불명이 됐다. 나중에는 집에도 안 들어오더라. 어디선가 어떻게 사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자동 이혼이 됐다"

 

박재란 : "몇 번씩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바닷가에 나갔다. 신발까지 벗었다. 그런데 내가 이대로 죽으면 가족과 딸들을 어쩌나 싶었고, 다시 일어나 보자고 마음먹었다"

 

 

가수 박재란 딸 박성신과 재회, 이후 딸의 사망, 사망 이유 

 

가수-박재란-딸-박성신

 

그러던중 박재란은 생이별한 딸 박성신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하고, 한국에 돌아온 뒤 연결이 돼 만나게 되었지만 이후 딸 박성신은 2014년 8월 8일 45세의 나이로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돌연사하게 됩니다.

 

고 박성신(1968년생)은 서울예술전문대학 재학 중이던 1987년 제 1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회상으로 입상, 이후 MBC 강변가요제에서 비오는 오후로 가창상과 장려상을 받으며 실력과 인기를 입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1989년 1집 한번만 더 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이어 1991년 크림 하나 설탕 하나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2집 발표 후 연예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던 박성신은 2014년 8월 향년 45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되었는데요, 박성신의 사망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다는 제자 차영하의 말이 전해지면서 심장마비로 숨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박재란은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재란 :  "연예인 생활하면서 돈은 벌어야겠고 임신한 걸 모르게 하려고 복대를 차고 다녔다. 그런데 그걸 너무 꽁꽁 묶어서 아이가 그걸 못 견디고 조산했다."

 

박재란 : "그래서 인큐베이터에서 석 달 있었는데 애가 모든 기관이 다 약하다. 운동을 해도 안 됐다.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대전에서 사위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쓰러져서 사망했다고 하더라."

 

박재란 : "장례식장에 있던 딸의 영정사진 앞에서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후였다. 사위가 내 상태를 알고 딸의 묘지를 안 알려줬다. 딸의 마지막 순간을 하지 못했다. 한 번은 비가 쏟아지는데, 딸이 너무 보고 싶더라. 차 운전대를 잡고 딸의 이름을 불렀다."

 

가수 박재란 딸 박성신 사망 이후 근황

 

가수-박재란

 

박재란은 이후 한 방송(특종세상)에서 딸 박성신이 간 다음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흔적을 다 없앴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다 없애고 난 후에 핸드폰에서 이 사진이 나왔다고 하며 세상을 떠난 고 박성신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큰딸과 사위 가족은 중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사위와 사이가 껄끄러워 딸 박성신의 묘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후 한 방송(현장르포 특종세상)을 통해 딸 고 박성신의 묘를 찾는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는데요, 당시 방송에서 제작진은 박성신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의 제보를 받았고, 박재란과 함께 박성신의 묘를 찾았습니다.

 

박재란은 "딸의 묘를 찾게 돼 꿈만 같다."며 묘 앞에서 "어째서 먼저 갔냐. 네가 없어서 엄마가 외롭다"고 외치며 오열했고, 이어 "엄마가 너 찾았으니까 이제 자주 올게"라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박재란은 2017년 40년의 공백기를 깨고 꼴찌면 어때서 노래로 다시 활동을 시작, 가요무대와 아침방송, 속풀이쇼 동치미 등을 통해 종종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번에 가요무대에 출연하게 된 가수 박재란인데요, 앞으로도 좋은 모습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가수 박재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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