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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하춘화가 9월 2일 KBS 가요무대에 출연합니다.
이에 하춘화 나이 프로필 재혼 남편 자녀 근황 등 관심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가수 하춘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춘화 프로필 나이 고향 가족 키 혈액형 종교 학력
가수 하춘화 나이는 1955년 6월 28일생으로 올해 69세입니다. 하춘화 고향은 전라남도 영암군이며, 4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가족으로는 부모님과 남편이 있고, 늦은 결혼으로 인해 첫 임신이 유산된 뒤 아이를 갖지 못해 자녀는 없다고 합니다.
하춘화는 키 162cm, 혈액형은 A형이라고 하며, 종교는 천주교(세례명 체칠리아)입니다.
학력은 서울수송초등학교, 정화여자중학교,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 전문대학 가정학 전문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 학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취득,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가수입니다.
하춘화는 만 6세 때인 1962년 당대의 가수들도 발표하기 어려웠던 10인치 LP 스튜디오 앨범인 당년 7세 소녀가수 앨범으로 데뷔, 이후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 히트, 그 이후에도 잘했군 잘했어, 영암 아리랑, 연인 부르스, 아리랑 목동, 날 버린 남자, 연하의 남자 등 무수히 많은 곡들을 히트시킵니다.
하춘화 과거 데뷔 앨범 활동
하춘화는 7살 때(만 6세 때)인 1962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해에 데뷔, 처음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하였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킨 것인데요, 그렇게 1962년 데뷔하고 이어 1966년 발표한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가 크게 성공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춘화는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이에 하춘화는 아버지에 대해 내겐 남자친구, 아버지, 조언자 여러 가지 역할을 아버지가 하셨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셨다고 하는데요, 당시 하춘화는 동생이 뇌수막종으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 아버지 생각보다 동생을 살려달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게 마음에 걸린다며 지금도 아버지의 사진을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해둘 만큼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애틋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춘화는 그렇게 데뷔 초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1971년 발표한 물새 한마리가 히트, 이어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 이것으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하춘화 : "6살 아이가 대중가요 발표한 건 최초라 외신들이 취재왔다. 역도산이 한국을 방문해 만났다. 일본으로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라고 해서 아버지가 반대했다. 일본인이 되는 건 싫다고 해서 무산됐다"
하춘화 : "제 첫 무대는 당시 제일 큰 극장이었다. 독집 앨범에 12곡을 담았다. 발표한 노래만 2500곡 정도 된다. 신곡 연습할 시간도 없이 다음 앨범을 제작했다. 작사 작곡이 끝나면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몇 천 곡의 노래를 발표한 건 나훈아, 이미자. 하춘화 셋 뿐이다."
참고로, 하춘화는 당시 한때 최연소 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서 마이클 잭슨이 5살의 나이로 데뷔함으로서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춘화 은퇴, 복귀, 이후 활동 근황
이후 하춘화는 1977년 11월 이리역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는 사고와 이어 학업과 결혼 준비 등으로 은퇴를 선언, 이후 학업에 열중하다가 다시 2년 만인 1981년 복귀, 학업을 병행하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이때 우리 사랑 가슴으로가 히트하였고, 1983년에 자신의 무대 의상 150벌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목을 끌기도 했으며, 1985년에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시 남측 여자가수 대표로 3박 4일간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공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후 1989년 날 버린 남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서 다시 각광받기 시작, 1991년에 총공연 8,000회를 기록하며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합니다.
하춘화 : "기록을 내려고 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 최다 콘서트 보유자가 되었다. 8500회 정도 된다. 1년에 절반을 공연했다. 리사이틀 한참 할 땐 하루 공연 2-5회였다. 최대 10시간 공연이었다"
하춘화 : "한 공연에 8가지 무용, 노래 30곡을 했다. 등창난다고 땀 때문에 등이 곪았다. 사춘기도 못겪고 성장했다.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짜장면집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중 3 때 첫 히트곡 물새 한 마리가 나왔다.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춘화는 또 이후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 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고, 이후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지만 학업을 병행하며 2007년 다시 복귀해 나이야 가라(2014),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2018) 등 신곡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하춘화는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하였고, 2009년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한때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방송음악학과 겸임교수, 경남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전임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행복한 아침, TV는 사랑을 싣고, 불후의 명곡, 가요무대, 사랑의 콜센타 등의 방송에 출연, 근황을 알리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가요무대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하춘화 수상 경력>
-1966년 최우수 가수상
-1971년 제 6회 핑크리본상 인기가수상
-1971~1978년 MBC 10대 가수상(총 7회)
-1994년 제 13회 가톨릭 가요대상 공로상
-2001년 제 16회 골든디스크 공로상
-2001년 옥관문화훈장
-2003년 사회복지부문 영암군민의 상
-2003년 대한민국 가수 왕중왕상
-2011년 보건복지부 장관상
-2011년 제 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2012년 여의도클럽 방송인상 특별공로상
-2020년 제 1회 트롯어워즈 트롯 100년 가왕상
-2021년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하춘화 이주일과 특별한 인연
한편, 하춘화는 고 이주일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하춘화 : "1977년 리사이틀 하는데 전속 사회자를 모집했다. 공고를 보고 이주일이 찾아왔다. 단장님이 너무 못생겼다고 불합격시켰는데 제가 오디션을 보자고 했다."
하춘화 : "탈선 춘향전 공연을 하는데 이주일이 너무 열심히 하더라. 전속 계약을 맺고 10년간 함께 공연을 돌아다녔다. 제 8500회 공연 중 7500회는 그와 함께였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77년 하춘화가 큰 사고를 당하면서 둘의 인연은 더욱 돈독해지게 됩니다.
1977년 11월 11일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의 삼남극장(이리역 근처)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면서 약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사고가 발생한 것인데, 이때 코미디언 이주일이 아수라장이 된 역사내에서 어린 하춘화를 업고 나온 것입니다.
하춘화 : "이리역과 제 공연장은 500미터 거리였다. 그런데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했다. 위력이 엄청났다. 이리시 전체의 유리를 깨뜨렸다. 1977년 11월 11일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 땅속으로 떨어지는 공포가 느껴졌다. 이리시 전체가 암전됐다. 공연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하춘화 : "나 혼자 살아 나가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이주일 목소리가 들렸다. 암흑 속에서 나는 많이 다친 것 같아요 하더라. 전쟁이 난 것 같으니 빨리 나가자고 했다. 나무 하나가 걸려 있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더라."
하춘화 : "담장 위로 가서 뛰어내리락 했는데 못하겠다고 했다. 결국 이주일의 머리를 딛고 내려왔다.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져서 두개골 함몰 부상을 당했는데도 몰랐다. 이주일이 내 생명의 은인이다"
당시 하춘화는 어깨에 타박상을 입었던 반면에,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사고 이후 이주일은 대수술과 4개월간의 입원치료를 거쳐 건강을 회복합니다.
이때의 일로 하춘화 역시 이주일을 평생 은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실제로 하춘화는 2002년 이주일이 사망했을 때도 빈소를 찾았고, 장례식 때 조시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너무 가슴에 사무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합니다.
하춘화 학자 가수
하춘화는 또한 가수 활동 중에도 학업에도 열중하여 2006년 8월 25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가수로도 유명합니다.
하춘화는 현재 학사 3개, 석사 1개, 박사 1개로 학위를 5개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 가수 중에서는 가장 갯수가 많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매가 넷인데, 다른 자매와 달리 혼자 박사학위 없이 가수로 생활하다보니 학위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기대 영향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에 대해 하춘화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하춘화 : "내가 둘째인데 자매가 다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버지가 다 딸들의 학위증을 걸어두셨다. 근데 하나를 띄워두셨길래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거기가 네 자리라고 하시더라. 너무 부담돼서 38살에 공부를 시작해서 1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춘화 결혼 전남편 나이 직업 이혼 사유
하춘화는 전남편 정운창씨와 1981년 첫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 이후 가수 활동 재개로 의견이 부딪치면서 불과 1년도 되지 않아서 10개월 후 이혼을 하게 됩니다.
하춘화 전남편 정운창씨의 직업은 사업가였다고 하며 그외에 나이 학력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전남편과는 불과 1년도 안돼서 헤어졌기 때문에 자녀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춘화 재혼 남편 이인순 나이(차) 직업, 누구?
이혼 이후 하춘화는 오랫동안 혼자 살다가 약 10년이 흐른 뒤인 1995년에야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하게 됩니다. 하춘화와 남편 이인순 씨 두 사람의 나이차는 하춘화는 1955년생인 68세이고, 남편 이인순 씨는 1951년생인 72세로 4살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하춘화 남편 이인순 씨의 직업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 KBS 기획조정실 관리부차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춘화 남편 이인순 결혼스토리
두 사람은 중매로 만났다고 하는데요, 처음에 하춘화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춘화 : "중학생 때부터 알았던 국장님이 자신의 오랜 친구를 소개시켜줘 중매로 만났다. 누군지 모르고 만났다. 국장 언니가 진국이라고 해서 봤는데 와이셔츠 안에 검정 러닝셔츠를 입었더라 너무 별로였다."
하춘화 : "남편은 사실 내 이상형이 아니다. 남편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런데 소개 이후 남편이 1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1년 만에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났다. 12월 31일 호텔에서 만나자더라."
하춘화 : "보통 데이트를 하면 상대에게 언제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보는데 우리 남편은 첫 데이트에 약속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정해서 통보했다."
하춘화 : "그런데 그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게 12월 31일이었는데, 남편이 회사 종무식에 참석하느라 술에 취한 모습으로 늦게 나타났다. 나에게 티를 안 내려고 꼬부라진 혀로 대화를 시도했다."
하춘화 : "남편이 연락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최근(2021년 기준)에서야 알았다. 유명세를 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하더라. 남편이 1년여간을 고민 끝에 그냥 부인의 직업이 가수일 뿐이다 라고 다시 만날 결심을 하게 됐었다고 하더라."
당시 두 사람은 각각 38살(하춘화)과 42살(이인순)이었습니다. 결국 하춘화는 그런 남편의 신중한 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둘은 6개월 간의 연애끝에 1995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하춘화 : "연애결혼 같은 경우는 서로 조건을 안 따지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 결혼 전 호적등본, 건강진단서를 교환했다."
하춘화 남편 이인순 자녀
두 사람은 그렇게 신중한 결정으로 결혼에 골인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아무래도 늦은 결혼이다보니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다고 합니다.
사실 신혼 초에 임신을 한 적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유산을 한 뒤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하춘화는 이후 입양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하지 않았습니다.
하춘화 : "결혼한 뒤 얼마 지나 아이가 생겼다. 하지만 유산된 뒤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일에 대해 서두르지 않고 순리대로 일을 진행하고 싶다."
하춘화 : "노력을 많이 했다. 이미 나에게 많은 걸 주셨으니 자식은 안 주시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더 걱정하더라, 큰 불행, 결점인 것처럼 얘기하더라. 입양도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다. 그런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했다"
하춘화 남편 이인순에 대한 이야기
하춘화는 2020년 한 방송에서 남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춘화 : "보통 여자들은 자신의 나이를 감춘다. 그런데 저는 나이를 밝히기에 바쁘다. 남편과 미용실을 가면 종업원들이 남편에게 물어보는 말이 있다. 종업원이 남편에게 하춘화 씨 아버님 되세요?라고 묻는다. 당시 남편은 본인이 멋을 부리지 않아 오해를 받았다는 변명을 했다."
하춘화 : "얼마 전 남편과 함께 간 미용실에서 또 부녀지간으로 오해를 받았다."(2020년 방송 기준)
하춘화는 남편 이인순 씨에게 항상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고백하며 인기스타이다보니 바쁜 스케줄로 인해 가정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항상 옆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는데 남편보다 아버지 비중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한춘화를 타박한 적이 없고, 네 부모 내 부모 하지 말자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춘화 수입 재산 기부 활동
하춘화는 2011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하춘화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여 이를 통해 벌어들인 200억 원을 불우 이웃 돕기에 기부하여 화제를 낳은 바 있습니다. 40년 동안 하춘화가 기부한 금액은 무려 300억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하춘화 : "부모님께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그렇게 받았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다. 40년 전 서울 집값이 300만원이었는데 공연 수익금 1-2천만원을 기부했다."
하춘화 : "기부 액수를 묻길래 어림잡아 200억원 대충 얘기했는데 더 될 수도 있다. 제가 1세대인 황금심, 백설희, 현인, 김정구 선생님들과 한 무대에 섰다. 아버지가 그 자료들을 다 모으셨다."
하춘화 : "먼 훗날 공공기관에 기증해서 대중문화의 연구 자료로 주고 싶다 하셨다. 전남 영암군에 기증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를 건립했다"
하춘화 : "어린이를 돕는 것은 국경, 이념을 초월해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의무다. 그들을 돕는데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나눔 실천은 생활 속에서 항상 함께 해야 하며, 돈이 많아서 돕는 게 아니라 평소의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여서 꾸준히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기부액만 봐도 하춘화 수입과 재산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는데요, 실제로 하춘화는 과거 한때 문화예술인 세금납부액 1위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 달에 집 몇 채 값을 벌었고, 한창 때는 1회 공연 출연료가 1억씩 했는데 공연을 하루에 서너번씩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하춘화의 목표는 신인가수를 발굴할 트로트 아카데미 건립과 90세가 될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데뷔 60년이 넘었음에도 아직 69세이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가요무대에 출연하게 된 가수 하춘화인데요, 앞으로도 좋은 무대와 다양한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져가시는 모습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가수 하춘화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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